부흥사연수원

CYBER SCHOOL OF THEOLOGY

부흥사연수원

제목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2022-07-01 14:49
작성자 Level 10

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

1.초대교회사에 나타난 부흥운동

교회 성장의 첫 번째 시대는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에서 어거스틴까지(A.D. 약400년경)였다. (이 장식.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77, p183)

교회의 부흥운동은 교회가 타락하였거나 어려웠을 때에 일어나 교회를 성장시켰다.

교회사의 신앙운동의 신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교회의 부흥운동은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요, 타락과 갱신의 반복이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2. 1993)

교회 타락의 원인은 대체로 내부에서 일어났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2. 1993)

가. 콘스탄틴 이전의 부흥운동

초대 기독교는 심한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로마제국을 기독교화 시켰다.

기독교인들에 대환 박해는, 로마 황제 숭배의 거부가 주원인이었다. 기독교인들의 박해는 제 1세기 네로로부터 제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안이 착수한 박해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313년에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313년에 밀란에서 전 제국에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발함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고 박해가 종지부를 찍었다.

기독교의 박해는 교회의 신앙을 연단 시켰고, 생명력을 잃지 않고 부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4. 1993)
그러나 이러한 박해 가운데 교회안에서는 몬타누스(Montanus), 노바티안(Novation)등 분파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①.몬타누스(Montanus)-2세기 후반 청교도적인 개혁운동으로 일어난 몬타니즘으로 이들의 두 가지 기본사상은 ‘성령’과 ‘종말’이었다. 이들은 엄격한 금욕생활과 주의 오심을 대망하는 것이었다. 6세기까지 교회를 어지럽게 하였다. 후에 수도원 제도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김 우영, 기독교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p22. 1995)

②.노바티안(Novation)-박해에 못이겨 변절하였던 기독교인들에 대해 교회는 고민하게 되었다. 이때에 교회 정화를 표방하고 스스로를 청교도로 자청하며 배교자들의 재세례를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바로 노바티안이다.(김 의환, op. cit, o. 94)

*초대교회의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

(1)네로(Nero)의 박해(54-68)

주후 64년 로마시에 대화재 사건으로 시의 14구중 3구가 전소했고 7구가 반이상 탄 사건이 있었다. 네로는 이 화제의 사건을 마지막 남은 자신을 지지하는 비천한 계급인 플렙스(Plebs)의 동정을 잃지 않기 위하여 이 방화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 씌웠다.(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p49. 1989)

박해의 방법은 맹견과 사자밥이 되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며, 화형을 시켰다. 네로는 궁정에서 베푸는 연회석을 밝히는 인간 봉화로 기독교인들을 쓰기도 하였다.(베드로와 바울의 순교도 이때 인듯하다.)(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p49. 1989)

(2)도미티아누스(Domintianus)의 박해(81-96년)

도미티아누스는 81-96년 사이에 황제예배를 강요하였다. 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주요 신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들의 박해는 황제예배를 거부하므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때문에 모든 신이 노하였다고 하여 박해를 시작하였다.(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p50. 1989)

박해의 방법은 재산을 몰수하고, 맹수와 결투를 시켜서 찢겨서 죽게 하고, 당시 귀부인 빌립보의 루디아와 집정관 플레비우스 클레멘스는 사형을 시키고, 그의 처와 같이 저명인사를 로마에서 추방하였으며,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하였다.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은 카타콤(catacombs;지하무덤)에서 예배를 드렸다.(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p50. 1989)

(3)트라야누스의 박해(Trajanus, 97-117)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정치적 음모를 꾀한다는 것과 로마의 일반 시민들과 기독교인들과의 사회생활의 부조화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황제 상에서 절을 강요하였고, 순응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죄인 취급을 하였고, 집회도 불허하였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감독인 그나티우스를 원형극장에서 맹수에게 던져 순교당하게 하였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6. 1989)

(4)하드리아누스의 박해(Hadrianus, 117-138)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미워함에 의한 박해였다. 기독교인이라고 고발당하는 자는 처벌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6. 1989)


(5)마리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박해(Marcus Aurelius, 161-180)

가정교사의 가르침으로 알게 된 기독교인의 편견에서였다. 많은 기독교인을 살해하였다. 주후 177년에는 리용과 비엔에서 심한 박해가 일어났다.

박해 방법으론 대중이 많이 모이는 유흥지에서 기독교인들을 축출하고, 시장과 거리에서 심문하였고, 신앙을 포기하는 로마인은 용서를 하여 주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목베어 죽였으며, 로마인이 아닌 사람은 짐승에게 던져버렸다. 심지어 감옥에서 죽은 시체는 개에게 던져 주고, 시체를 장사 지내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에 가냘프고 약한 노예 소녀 불란디나는 당시 폭도들의 입에서, ‘우리 시대에 그 어떤 여자도 이 만한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고통 중에도 그 소녀는 신앙을 지켰고, 어느 관리의 손에 의해 도살되어 순교되었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7. 1989)




(6)셉티미우스 세베루스 (Septimius Serverus, 191-211)의 박해

아프리카 출신의 군인으로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했으나 그의 아내 돔나(Domna)는 에메사(Emesa)의 태양신, 엘 가발(El Gabal)의 사원의 제사장의 딸로서 기독교와 대립되는 신앙과 예배를 형성하려고 이교(異敎)측에 노력하므로 교회에 대한 대책이 엄하게 된 것 같다.

202년에 셉티미우스는 옛 방법으로 교회를 박해하기보다는 교회를 기사(飢死)케 하려는 의도를 가진 한 법령(法令)을 공포하였다. 그 법령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전도하여 개종자를 얻는 것을 금하는 입교 금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전도 사업을 하던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카데이지의 세례교인들이 큰 핍박을 받았다.



유스티누스(Justinus)의 빛나는 신앙의 계승자인 동시에 사도시대의 정신을 속사도시대로 계승해 온, 후 사도시대 교부들중의 제일인자였던 이레네우스(Ireraeus)가 순교를 당했으며, 오리게네스(Origenes)의 아버지 레오니다스(Leonidas)가 죄인으로 몰리어 옥에 갇혔다가 참수형을 당했다.(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8. 1989)




(7)막시미누스(Maximinus, 235-238)의 박해

군인출신의 폭군인 막시미누스는 셉티누우스 황제의 교묘한 대책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례교인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없애려 위협하였으며, 이 정책은 나중에 기독교인들이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으며, 이는 정치적인 작태(作態)의 하나였다.

막시미누스 황제 임기 동안에는 사형된 순교자는 없었으나, 유형을 보내고, 감옥에 투옥을 시키는 방법으로 박해를 했다.



로마의 감독 힙폴리터스(Hippolytus)와 폰티아너스(Pontianus)는 사르디니아 금광에 유형을 받다가 노예로 죽임을 당했다.(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8. 1989)




(8)디키우스(Dicius, 249-251)의 박해

옛날 전승, 과거의 국위 동경자들은 나라의 내우외환이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하여 무서운 박해가 일어났다. 그 중 한사람이 디키우스 황제다.

그는 로마가 옛 신들을 섬길 때는 부강했는데 기독교가 들어오자 나라가 쇠퇴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칙령을 내려(250) 조직적으로 전국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원칙, 무력으로 박해했기에 가장 혹독한 박해였다. 신자들을 죽여 순교자를 내는 것 보다, 악형, 감금, 공갈로 사신을 숭배케 함이었다.

그러나 순교자들도 많이 나왔는데, 로마 감독 파비안(Fabian), 안디옥감독 바빌라스(Babylas)가 순교를 당하였고, 오리케네스(Origenes)는 중형을 받았으며,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도피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9. 1989)




(9)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의 박해

병과 흉년은 신이 노한 까닭이라 하여 257-8년에 걸쳐 대 박해를 강행, 신자의 집회를 엄금, 교회와 토지를 몰수, 감독, 목사, 집사들을 처형, 고위층 신자들을 유형, 가산을 몰수했다.



이 박해에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갈다고에서, 씩수투스(Sixtus)Ⅱ 감독과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집사는 로마에서, 플락투오수스(Fructuosus)감독은 스페인에서 각각 순교를 했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9 1989)




(10)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의 박해

비천한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의 추대로 로마 황제가 되어 비상한 행정력의 소유자로 조직력의 강자였는데, 기독교인의 강력한 조직체에 자신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자, 부제 칼렐리우스(Galerius)의 참소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와 왕궁에서 일하는 교인을 내쫓고 303년2월에 3번의 칙령을 내려 예배당 파괴, 성경 압수, 교직자를 투옥, 악형로 제사를 드리게 했다.

304년에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제사드릴 것을 엄명한 제 4칙령을 내렸다,



무서운 박해로 다카우스 때와 같이 순교자도 많이 나왔고, 배교자들도 많이 났으나, 기독교인들을 이해한 일반 민중들은 적대치 않았다. 이 당시 니고메디아 회당이 파괴되었고, 성 가다리우스는 옥중에서 순교했다.(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9. 1989)

그 외에 놋화로에 산채로 넣어 굽는 방법, 끓는 납물을 붓는 법, 눈을 빼거나 지체의 일부를 불구로 만드는 방법 등의 박해가 있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3. 1993)




나. 콘스탄틴 이후의 부흥운동




로마 제국의 호의에 힘입어 3세기 하반 평화기에는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단으로 인하여 시련을 겪고 논쟁을 하였다.

아리우스(리비아 출신)가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을 부인하고, 제3의 존재(tertiumquid)로 생각하였다. 아리우스는 예수그리스도는 피조물이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본질과 동등하지 않고 유사하며, 참신이 아니고, 같은 성품도 아니고, 동격도 아니며, 오직 은혜를 주어서 세계 창조의 중개자가 되었다고 하였다.(손 두환. 총신 출판사. 기독교회사(1).p175.1989)

그리하여 알렉산더 감독은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와 그의 동조자들을 정리하였다.(320-321년)(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4. 1993)



325년 5월20일에 니케아 회의가 콘스탄티누스와 약 300명의 감독들이 모여서 열리고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었다.(참석자에 대하여 유세비우스는 250명. 아타나시우스는 318명이라고 함.)

이 회의에 대세의 결정은 아타나시우스의 힘이었다. 이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인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교의가 확정되었다.(손 두환. 총신 출판사. 기독교회사(1). p180. 1989)







다. 어거스틴 회심과 부흥운동




본명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이다. 어머니 모니카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고,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죽기 전에 개종한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 기독교 교리문답을 배우며 자랐다. 그러나 한때는 타락하여 혼전 여인과 동거하여 아들 아데오다투스(390년 사망)를 낳았었다.

그리고 마니교에 빠져 10년 동안을 마니교의 구도자(auditor)로 지냈다.



어거스틴은 주위에 있는 기독교의 지식인들이 소개해준 신 플라톤 주의자들의 책을 읽고, 마니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돌이켜서 그리스도인이 된, 많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에 영향을 받게 되었고, 로마서(13:13,14)를 읽고 회심을 하여, 신앙에 절정에 이루게 되었다. 이때는 386년 늦여름이었다.

다음해 387년 부활절에 밀라노의 암브로오즈(Ambrose)에게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어거스틴은 그후에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에 있는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감독)가 되었으며, 훌륭한 저술가였으며, 수도원공동체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에 어느 누구보다도 심오한 영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5. 1993)







2. 중세 기독교사에 나타난 부흥운동




중세는 그레고리 1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590년경부터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1517년까지 약 1000년을 포함하고 있다. 중세는 교황권이 극도에 달하여 세속의 권력을 압도했으나 신앙은 반대로 극도의 타락을 한 시기이다.(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p25. 1995)




가. 십자군 운동




중세기에 가장 두드러진 부흥운동으로, 주후 1095-1464년에 끝난 4세기에 걸쳐 벌어진 부흥운동이다.

서방 기독교의 국가들이 성지를 이방인의 손에서 탈환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벌어진 운동이다. 정치적인 동기에서 지배된 운동이었다.

당시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과 순교정신으로 참여하였다.

중세 교회의 교권주의와 냉각해버린 신앙의 탈출구를 이 운동에서 찾으려 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6. 1993)




*십자가 운동의 연혁




①.제1차 십자군 소집은 1095년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설교를 통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외쳤다. 그리고 십자군 소집이 선포되었다. 이때 동원된 십자군은 약 5000명이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②.제2차 소집은 1147년에 예루살렘이 위협을 받게 되자 클레르보나의 베르나르가 소집했으나 다메섹에서 패함으로 종말되었다.




③.제3차 소집은 1187년 예루살렘이 이스람교의 살라딘에게 정복되자 십자군이 프리드리히 1세, 리처드 1세, 핍립 3세가 그 지도자였다. 이 전쟁은 3년간의 휴전으로 끝이 났다. 예루살렘을 순례자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하였다.




④.제4차 소집은 십자군들이 세운 국가들이 이스람교도들에게 위협을 당하자 인노켄틴우스 3세가 소집하였으나, 목적과는 달리 방향을 바꾸어 콘스탄티노풀을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을 수립하므로 성지를 회복하는 일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또 1212년에는 소년 십자군이 소집되었다.(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사 대사전(3). p373. 1994.)




⑤.제5차는 1219년에 이집트 카이로 원정 십자군이 일어났다.




⑥.제6차는 1228년에 교황에게 파문당한 친 이스람적인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끈 무혈 십자군이 일어나 예루살렙을 쟁취하였다.




⑦.제7차는 1248년에 루이9세가 이끈 십자군이 일어났었다. (송 영봉. 원색 세계 대 백과사전.(19) 한국 교육문화사. p202. 1994)




나. 수도원 운동




수도원 운동은 500-1550년 사이에 퇴보된 서부 유럽의 기독교에 개혁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일으킨 사람 에퀴데인(Aquitaini)은 공작인 평신도 였으며, 클러니 수도원을 창건 하였다.



또 하나의 수도원 운동은 프랑스 시토에 1098년 몰렘의 ‘로베르’가 설립한 시토(Citeaux)라고 불리는 공동체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이 공동체의 대표적인 인물은 버나드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깊은 명상을 소원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사로 잡힌 사람이었다.(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p27. 1995)




수도원 운동은 쇠퇴와 부흥을 거듭해 가면서, 프란시스 종단, 도미니크 종단, 어거스틴파 은자(隱者)들과 탁발 수도사들을 배출해 냈으며, 영적으로 침체된 교회와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충성도를 심화(深化)하고, 교회를 정화하여 부흥시킨 운동이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7. 1993)




다.위클리프와 후스의 운동




이 시대는 교회가 신앙 및 영적으로 타락하여 세속(世俗)한 시대였다.




위클리프(John Wyclif)는 1328-1384년 사람으로 옥스퍼드 바리올 대학의 유능한 교수로 어거스틴에게 감화를 받았고, 그를 통하여 플라톤에게 영향을 받았다. 라틴어와 영어로 쓴 많은 글들로 급진적인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법칙이다’ 생각하여 많은 사람에게 성서를 주기 위하여 1382-1384년에 성서를 라틴어로부터 영어로 번역하였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성서가 교회의 유일한 법칙이다. 교회는 교황과 추기경들이 중심한 것이 아니라, 예정된 자들의 전 회중이 교회다. 그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요 교황은 예정된 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수도교단들과 교황청의 반대를 일으켰으나, 침체되어 있는 신앙에 열기를 불러 일으켜 주고,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종교적인 부흥운동이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7. 1993)




후스(John Huss)는 1373-1415년에 사람으로 보헤미아에 위클리프 주의를 널리 전파한 자이다. 후스는 프라그 대학에서 신학석사를 받았으며, 신부로 안수를 받았으며, 대학에서 교직생횔을 하다가 총장이 되었다.

후스의 사상은 위클리프처럼 교회는 예정된 자들로만 구성되며, 교회의 진정한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신약성서가 교회의 법칙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청빈이 그 생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교황을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하였다.

그는 부와 정치적 힘은 교회를 부패케 하였으므로 근본적(根本的)인 개혁(改革)을 요구하며, 가난과 사도시대의 순수성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후대 종교 개혁가들의 주된 가르침이 되었다. 그는 교회 내(in)의 사람과 교회의(of) 사람을 구별하여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참된 교회원 일 수 없다고 가르쳤다.

1415년 5월 4일에 콘스탄트 회의에서 정죄를 받아 그해 7월 6일에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타락에 대한 항의와 성서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보헤미아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므로 부흥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8. 1993)







3. 종교개혁시대의 부흥운동




가. 루터의 부흥운동




종교개혁 운동을 벌린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1517년 10월31일에 비텐베르크 대학에 게시판으로도 쓰이는 비텐베르크(Witten berg)교회 정문에, 교황의 속죄권의 그릇됨을 반박하는 내용과 신학적 토의를 하고자,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게시함으로 시작되었다. 그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62개 조항을 보면“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은혜의 복음이다”라고 하였다.



루터는 독일의 동부 아이슬레벤에서 광부로 일하던 아버지의 7남매중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루터는 엄격한 부모에 의해 가톨릭신앙을 배우고, 마크데부르크와 아이제나오에서 학교 교육을 받았고 1501년 에어푸르트(Erfurt 엘풀트)대학에 입학하여 1502년에 문학사를 받았고, 1505년에 문학 석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률 공부를 위한 준비중, 함께 여행을 하던중 낙뢰를 맞아 죽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1505년 7월에 성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캄주의의 신학교육을 받고, 1507년에 신부(사제서품)로 안수를 받았다.

1508년 비텐베르크(Witten berg)대학교로 옮겨 1509년 신학사 학위를 받았고,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일반교양과목을 가르쳤고, 1512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 대학의 성경강좌(성서학)를 맡았다.(강 병도. 기독 지혜사.교회사 대사전(3). p639. 1994.)



루터는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놓고 번민하였다. 죄의식에 사로 잡혀서 자유함을 얻으려고 맡은 직책의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기도와 금식, 고행을 하였지만 영혼의 평화를 찾지 못하였고,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라는 말씀을 통하여 위안과 희망을 가졌고, 오직 은혜에 의한 칭의를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루터의 신학 사상은 바울의 신앙 사상을 따랐고,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옹호하였다.(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사 대사전(3). p639. 1994.)



루터의 부흥운동은 2천년 기독교 역사상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신앙인 동시에 일종의 성경적 신앙의 부흥운동이었던 것이다.(신 현균. 부흥신학의 이론과 실제. 도서출판. 우림. p144. 1997)



나. 종교개혁의 의의와 성격



종교개혁 운동은 중세기에 많은 신앙 운동가들이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신학운동과 신앙운동을 은총만(sola gratia), 믿음만(sola fide}, 성서만(sola Scriptura), 이라는 구호를 가지고 성공시킨 일대 정신운동이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1. 1993)

신학적으로는 ‘바벨론에 포로’를 당했던 복음을 해방시킨 운동이요. 신앙적으로는 율법주의에서 탈피한 이신득의 운동이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1. 1993)

이 운동은 로마 카톨릭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타락한 종교 암흑시대에 종교의 부흥운동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재발견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운동의 세가지 원리

①. 신학적으로는 잃었던 성서를 다시 발견하고, 덮어 있던 성서를 다시 열게 하였다. 성서만을 기독교인의 유일한 규범(規範)으로 삼고, 기독교회의 척도(尺度)로 삼았다.

②. 하나님 은총에 대한 재 인식을 시켰다. 인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며, 결코 사람의 어떤 공로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이시며, 그분만이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구세주이시다를 강조하였다.

③.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즉 믿음으로만 하나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깨우쳐 준 운동이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2. 1993)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001. 우리의 주요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땅위에 믿는 자들의 전 생애는 계속적 참회라야 한다는 것을 원하고 계신다.




002. 이 회개라는 말은 참회의 예전 곧 사제의 직에 의하여 집행되는 참회나 사죄에 대한 말로 이해될 수 없다.




003. 참회는 내면적 참회가 외적으로 여러 가지 육욕을 죽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참회 할 수 없다.




004. 형벌은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동안은 계속되는 것과 같이 내면적 참된 회개 역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005. 교황은 그 직권에 따라서나 교회의 칙령에 따라서 부과하는 징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다.




006. 교황은 하나님으로 부터 죄가 사해 졌다는 것을 선언하고 확증하는 것 이외에 아무 죄책도 용서할 수없다. 그러나 그가 만일 억제당한 일에서 사죄한다든지 그의 직책이 멸시받는 경우에는 죄는 제거되지 않고 용서 받지도 못한다.




007. 하나님은 철저히 겸손하게 되지 않은 사람의 죄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자기의 대행자인 사제에게는 굴복하신다.




008. 고해와 참회를 하게하는 교회의 법규는 산 자에게만 부여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다.




009. 그러므로 교황이 언제나 죽음과 외적 공경을 예외로 취급할 때면 성령께서 교황을 통하여 자비를 내리신다.




010. 임종을 맞이한 사람들에게 장차 사면을 받을 연옥 때문에 교회가 제정한 참회를 보류하는 사제들이 몽매하고 사악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011. 사람들이 교회에서하는 참회와 사죄를 연옥의 징벌이란 것으로 변해버린 이 가라지는 감독들이 자는 동안에 심겨진 것이다.




012. 전에는 일어난 죄의 사건에 대한 참회와 사죄라는 소위“교회법에 따른 징벌”은 진실한 회개가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사면 선언 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부과되는 것이다.




013.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으로써 모든 허물에 대하여 치루어야 할 것을 만족시켰고 교회 법규에 대하여 이미 폐기 되었다.




014. 죽은 사람의 불완전한 경건이나 불완전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큰 공포를 동반하는데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 큰 공포가 있게 된다.




015. 이 공포와 놀람 자체만으로도-다른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연옥의 고통과 아픔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016. 지옥, 연옥, 또 천국은 각각 구별되기를 이미 절망한 상태와 절망에 빠져들어 가는 경우와 구원의 확실성이 각각 구별되는 것과 같다.




017.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불안과 공포가 증가하고 동시에 드들의 사랑이 그들에게서 점점 자라고 더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018.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공로의 상태에나 사랑의 증가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이성의 근거로나 성서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는 것 같다.




019.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모두가 행복을 누리고 있고 그들의 축복을 확신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실한 것이라고 한다고 해도 증명할 수 없다.




020. 그래서 교황은 “모든 징벌의 완전한 사면”이란 말로써 벌이 깨끗이 사면 받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부과하려 했던 징벌만을 사면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021.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부를 삼므로써 사람이 모든 징벌에서 해방받고 행복해 진다고 말하는 면죄부 판매 권유자는 그릇되다.




022. 사실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에 대해서 단 하나의 징벌도 사할수 없다. 이 징벌은 그들의 교회의 법규에 의하여 받아야 하는 것이다.




023. 만일 징벌의 사면이 누구에게든지 주어질 수 있다면 그러한 사면은 소수밖에 없는 완전한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이 확실하다.




024. 그래서 백성은 대부분은 모든 징벌에서 해방 받는다는 무차별적이고 찬란한 약속에 의하여 기만을 당한 것이다.




025. 교황이 연옥에서도 일반적으로 장악했다는 것은, 같은 권세를 가진 모든 감독과 목사도 자기의 감독구와 교구 안에서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다.




026. 교황은 그가 (연옥에 대하여 전혀 갖지 않은) 이 열쇠의 권세를 근거로 하여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대도의 방법으로 영들에게 용서를 사여한다는 것은 매우 잘하는 일이다.




027. 헌금 궤에 떨어진 돈이 쩌렁 소리를 내자마자 연옥에서 영혼들이 올라온다고 하는 사람들의 사람은 교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028. 헌금궤 안에서 울려나자마자 이득과 탐욕이 자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교직자의 도움이나 대도가 성립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다.




029. 성 베리누스와 파스칼리스 전설에 있는 것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사면을 받겠는지 더욱 확신할 수 없다.




030. 아무도 자기의 홰개가 진실된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가 죄의 완전한 사면을 받겠는지는 더욱 확신할 수 없다.




031. 진실된 참회를 하는 사람도 드물고 진실된 마음으로 면죄부를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런 사람이 매우 드문 것이다.




032. 그들이 산 면죄부 증서로써 행복을 확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교사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 것이다.




033. 교황의 면죄부가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데 의존하는 가장 높고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한다.




034. 왜냐하면 면죄부로서 얻는 은총은 사람으로서 지워진 성례전적 속죄행위로 사하는 벌에만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035. 영혼을 연옥에서 구출한다거나 참회사를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참회 증서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비 그리스도적인 것을 설교한다.

036. 어떤 크리스쳔이든 자기의 죄에 대하여 참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히 면죄받는다.




037. 모든 참된 크리스쳔들은 산자든지 죽은자든지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의 선물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역 재산에 참예할 수 있다.




038. 그러나 교황이 주는 사죄와 거기에 참예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되는데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교황의 사죄는 하나님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039. 면죄부의 관대한 선사와 동시에 참된 회개를 민중 앞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며 학식이 있는 신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040. 참된 회계는 징벌을 구하고 그것을 사랑하나 많은 면죄부를 갖는 것은 징벌에서 해방하고 사랑이 그것이 싫어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도 그렇게 할 기회를 준다.




041. 교황의 사죄권에 대해서 설교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그것을 사랑의 업적보다 중요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042. 면죄부에 의한 사죄는 자선사업과 비슷한 것으로 비교하는 것은 교황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3.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궁핍한자에게 꾸어주는 사람은 면죄부를 사는것 보다 더 낳은 것을 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4.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의 행위로 성장하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면죄부로써 더 선명해지지 못하며 다만 징벌을 면할 뿐이다.




045. 이웃이 괴로워 하는 것을 보고도 본체만체하고 면죄부를 하는 사람들은 교황의 사죄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6. 그리스도인들이 넉넉한 재산을 가지지 못했다면 자기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장할 의무를 지며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낭비해서는 안된다.




047. 면죄부를 사는 일은 자유로 할 것이며 결코 강제로 명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8. 교황은 면죄부를 주는데서 얻는 돈보다는 사랑의 열성이 깃든 기도를 더 원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9. 교황의 면죄부는 사람이 그것에 신뢰를 두지 않는다면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할것을 잃는다면 그처럼 해로운 것은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50. 만일 교황이 면죄부 판매에 설교자들의 공갈행위를 안다면 그는 그의 양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더 원 할 것이다.




051. 어떤 면죄부 판매설교자들 그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교황은 자기 돈으로 또는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라도 갚아줄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052.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행복해지리라 믿는 것은 헛된 신앙이다. 교황 자신이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을 하려 한대도 그렇다.




053. 면죄부 설교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선포되기를 금지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054. 만일 사람이 한 설교에서 사죄권을 행사함에 복음말씀을 전하는 시간보다 더한 시간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055. 만일 사람이-매우 적은 가치를 가진-면죄부를 한방울과 단순한 행렬과 축제로써 축하한다면 매우 값비싼 백개의 방울과 백배의 행렬과 굉장한 축제로써 기리고 축제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교황의 견해이다.




056. 교황이 면죄부를 나눠주는 것은 근본인 교회의“보화”(여분의 공적을 말함)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충분히 묘사할 수도 알려줄 수도 없다.




057. 왜냐하면 그것이 현세적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보화를 쉽게 나누어주지 않고 도리어 모으기에만 힘쓴다는 것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058. 그 보화는 그리스도의 보화이지 성자들의 공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교황의 작업 없이도 언제나 역사하고 내적 인간을 위해서는 은총을 주며 외적 인간을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지옥을 주는 것이다.




059. 성 로체스는 공동체 안의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의 보배라고 불렀지만 그는 그 시대의 통용되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060. 우리는 이 보화란 것을 그리스도의 공로로써 교회의 산물로 준 교회의 열쇠의 권한이라고 근거있게 또 심증있게 말할 수 있다.




061. 왜냐하면 형벌의 면죄와 교황이 관리하도록 된 조건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교황의 권한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062. 그러나 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대한 거룩한 복음이다.




063. 이 보화는 자연적 상태로는 미움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된 자를 마지막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064. 그 반대로 면죄부의 근거인 보화는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는다. 그것은 마지막 자를 첫째로 만들기 때문이다.




065. 그래서 복음의 보화는 옛날에는 돈 많은 사람들을 낚던 그물이다.




066. 그러나 면죄부의 보화는 오늘 날에는 사람의 부를 낚는 그물이다.




067. 설교자가 큰 은총을 주기 위하여 외치며 파는 면죄부는 큰 이익과 향락을 갖다 주기 때문에 큰 은총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068. 그러나 그같은 면죄부는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축복과 비교한다면 매우 적은 은총이다.




069. 감독들과 교구 목사들은 교황의 사죄권을 위임받은 자들을 큰 경의를 가지고 맞아들이게 한 책임이 있다.




070. 그러나 그들이 더 큰 책임을 지는 일은 이 위임받은 자들이 교황이 맡긴 일 대신에 자기들의 꿈을 설교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 대해서 이다.




071. 교황의 사죄권을 반대하는 사람은 저주받고 추방당할 것이다.




072. 그러나 면죄부 판매 설교자들의 변덕스럽고 파렴치한 말을 거슬러 걱정하고 슬퍼하는 축복을 받을 찌어다.




073. 교황은 면죄부 판매에 손해를 입히고자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 분노나 추방으로 보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074. 교황은 면죄부라는 구실 안에서 거룩한 사랑과 진실성에 손실을 끼치기 위하여 책동하는 사람들에게 더 심하게 분노와 추방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볼 것이다.




075. 교황의 면죄부에는 굉장한 힘이 있어서 어떤 사람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성모를 능욕했더라도 죄에서 해방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헛된 생각이다.




076. 그와 반대로 우리는 교황의 면죄부는 가장 적은 죄도 없이 할수 없으며 죄로써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077. 만일 성 베드로가 지금 교황이었더라도 큰 은총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와 교황을 모독하는 것이다.




078. 그와 반대로 우리는 이 교황이나 다른 어떤 교황이라도 면죄부보다 더 큰 은총, 즉. 다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福音)과 성령의 능력과 병고치는 은사들을 자유로이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079. 교황의 문장을 화려하게 찍은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능력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080. 이 같은 가르침이 민중앞에서 말해지는 것을 보고 묵인하는 감독 교구 목사 신학자들은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081. 면죄부에 대한 그 같은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설교는 교황의 명예와 품위를 비방이 또는 순박한 삶을 끌수 없는 예리한 질문에 대해서 수호하는 것은 아무리 학식있는 사람일 찌라도 어렵게 만든다.




082. 예를 들면 교황은 왜 모든 영들을 그의 가장 정당한 이유로서 가장 거룩한 사랑 때문에 또 심령들의 지극한 곤궁 때문에 연옥에서 해방시키지 않는가. 실제로 그는 베드로 성당을 세우는데 불쌍한 그리스도인의 돈으로써 하기 보다는 자기의 돈으로 해야 할 것이 아닌가.




083.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것은 옳지 않은데 왜 아직 죽은 자의 장래식이나 해마다 하는 제사가 남아있으며 교황은 죽은자들을 위해 바친 것을 돌려 주지도 않고 그 기부금을 취소하기를 허락하지도 않는다.




084. 또는 그들이 하나님없이 사는 자 즉, 적대자들에게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영혼으로 속해내기를 허락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영혼자체의 큰 곤경을 위해서 사랑으로부터 해방하여 내지 않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하나님과 교황에 대한 경건이 아니겠는가.




085. 또는 참회에 관한 옛 조문이 오래전에 사실 폐지되고 사용되지 않고 죽은 글이 되었는데 왜 아직 사죄권과 관련되어 그것이 아직 효력이 있고 산 조문인 것처럼 돈으로써 구해낸다고 인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086. 또는 오늘날 제일 부자보다 더 능력을 가진 교황이 지금 성 베드로 성당을 세우는데 불쌍한 그리스도인의 돈으로 하기 보다는 자기 돈으로 할 것이 아닌가.




087. 또는 교황은 참회로써 완전한 용서를 받고 영적 재산에 참예할 수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사해주고 나누어 주려고 하는가.




088. 또는 교황은 용서와 은총에 대한 참여를 지금 하루에 한번 주는 대신에 백번 모든 믿는 자에게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 되겠는가




089. 교황이 면죄부로써 돈보다 구원을 관심했다고 본다면 왜 그는 똑같은 효력을 가졌다 고 보이는 면죄부에 대한 옛 교서를 정지시겠는가




090. 만일 평신도의 예리하고 사려깊은 항의를 권력으로 억압하고 근거제시를 통하여 가라 않히지 않는다면 교회의 교황은 원수에게 조소거리가 되고 그리스도인은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091. 만일 면죄부가 교황의 정신과 의견에 따라 설교로 권유한다면 이 모든 의문은 해답되었을 것이며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092. 평화가 없는데도“평화”,“평화”하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093. 그러나 십자가 없는 곳에“십자가”,“십자가”하고 그리스도 백성들에게 말하는 예언자만이 축복을 받을 것이다.




094. 크리스천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야 한다.




095. 그래서 여기 평화가 있다고 하는 태평한 환상으로 보다는,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더 의지하게 하여야 한다.

*참조 (http://my.netian.com/~cavin7/95개조.htm)







4. 근대 교회의 부흥운동




가. 독일의 경건 주의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근대 과학과 철학(哲學)은 기독교 신앙(信仰)에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런 시대에 가슴에 와닿는 종교적 체험과 경건생활의 미덕을 강조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이다.



독일 경건주의(Pietism) 운동은 스콜라적 경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건설해 나가는데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다 세상에 대한 금욕적 자세가 부과되었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3. 1993)

*스콜라(schola)란 말은 라틴어의 학교란 뜻이다. 즉 4세기부터 서 유럽 기독교의 수도원과 성당에 마련된 부속학교에서 가르치던 학문을 스콜라 학(scho-lasticism)혹은 스콜라 철학(scholastic philosophy)라 한다.(강 영선. 교육출판공사. 세계철학 대전. p610. 1989)




독일 경건주의 중심인물은 쉬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이다. 이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성서적 의학(exegesis)을 배웠고, 신앙훈련을 받아 내면적 깊이를 가꾸기 시작했다.

이는 신비적 경향이 짙었던 아른트(Johann Amdt 1555-1621)의 <진실한 기독교인>(참된 기독교에 대한 네권의 책; four Books Concerning True Christianity 1606-1609)에서 영향을 받았고, 게르하르트(Paul Gerhardt)에게서도 감화를 받았으며, 텔링크(Willem Teelinck)와 푀트(Gisbert Voet)가 중심이 되어 있던 ‘화란의 경건 주의자(Dutch Pietist)’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영국의 청교도인 하나 베일리(Lewis Bayly)나 박스터(Richard Baxter)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쉬페너는 1666년에 교회의 목사가 되어 신령한 종교생활을 위한 소집단(小集團)을 만들고 그 그룹을 Collegia Pietist라 불렀다.

(Collegia-Pietistm-독일 경건주의)




개신교의 부흥운동은 독일을 중심 하여 쉬페너가 일으켰던 경건운동에 그 기조를 가진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4. 1993)

그는 경건한 요구(Pia desideria)를 발표하여 성직자들도 논쟁하는 설교가 아니라 참 삶의 경건성과 그 훈련을 형성시켜 줄 수 있는 방향의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그러한 의미의 신학 교육을 실시해야 된다고 갈파(喝破)하였다.(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2. 1995) (*갈파(喝破)=그릇된 설을 무너뜨리고 진리를 밝혀 말함)







나. 모라비안 교도의 부흥운동(Moravian Brethren)




모라비안 교도들은 보헤미아의 후스교회의 사람들로 박해를 피해 모라비아에서 숨어 살던 무리들로, 1722년경부터 독일 작센지방으로 피난을 오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경건주의의 각성을 불러일으킨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 중에 하나가 진첸도르프(Nicolaus Ludwing Von Zizendorf. 1700-1768) 백작의 지도 하에 결성된 모라비아형제단(Moravian Brethren)이다. 진첸돌프는 작센 고위관리였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쉬페너’와 ‘프랑케’와 절친한 친구인 외조부가 키웠으며 할레학교(Paedagogium)에서 교육을 받았다(1710-1716).(강 병도. 기독 지혜사.교회사 대사전(3). p255. 1994.) 1727년 8월을 모라비아 교회의 재생의 날로 본다.

모라비아 교회는 ‘어디든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가겠노라’는 결의로 선교에 대한 사명감에 불탄 교회였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5. 1993)

이 교회의 목적은 주로 전도였다. 숫자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존 웨슬리를 비롯한 세계의 많은 전도자들이 이들의 열심과 선교의 비젼에서 영감을 받아 헌신을 다짐하였다.(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3. 1995)







다. 웨슬리의 부흥운동(John Wesley, 1703-1791)




영국은 17세기말부터 산업혁명의 결과로 자연신론(Deism)과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회는 종교에 무관심하고, 퇴폐한 도덕생활에 빠졌다. 그리고 기독교계는 합리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때 18세기의 영국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준비된 인물이 죤 웨슬리였다.(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3. 1995)




죤 웨슬리는 1703년 목사인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의 19자녀 중에 15째의 소생으로 태어났으나, 믿음에 대한 기쁨이 없이, 영적 고민에 늘 쌓여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738년에 올더스케이트 가에서 성경 연구와 기도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로마서 서문을 듣다가 마음이 뜨거운 체험을 하고, 1739년에 런던 패터레인 집회소에서 기도중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을 체험하였다.

당시 성공회는 의식을 위주였으며, 중상류 계급에만 관심을 가지고 대중과 노동자를 방치하였으므로, 웨슬리는 주로 공장지대와 빈민촌을 다니면서 심령부흥운동을 일으켰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7. 1993)



죤 웨슬리는 스코트랜드와 아이슬랜드에까지 성공회가 가르치치 못한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였으며, 연 평균 12,000킬로미터를 다니며 부흥운동을 펼쳤다. 1791년 그가 죽던 해 그를 따르는 교인 수는 영국이 71,668명이었고, 미국이 43,26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7. 1993)

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다는 점은 루터와 같았으나 구원의 본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루터와 달리하였다. 그는 신자는 현세에서 죄를 멀리하여 청결한 생활에 들어가야 하며, 마음속에 사랑이 지배할 때 완전한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예정론에 있어서는 반 칼빈주의적 입장을 처하였다.




죤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얼어붙은 영국의 종교를 녹이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를 개혁시키고, 선교의 불을 일으키는 기폭제(起爆劑)가 되었다.(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4. 1995)







라.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 1720-1772)




이 운동은 합리주의의 팽창, 문화적 혼란의 와중에 미국 뉴저지의 라리탄 계곡의 화란 개혁교회 서클에서 시작되어 50여년 동안 계속된 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을 시작한 프렐링후이센(Theo-dore J. Frelinghuysen)은 회개와 새 생활을 강조하였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멸망 받을 것이라고 외쳤다. 이와 같은 경고를 받아들여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8. 1993)




이 운동 중에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가 나타나 영혼을 일깨우는 설교를 통하여 회개를 불러 일으켰다.(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4. 1995)

조나단 에드워드는 신의 주권성과 예정론을 골자로 한 칼빈주의 신학에 철저하여,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설교를 연속으로 하였다. 이 설교는 뉴잉글랜드에서 발달한 알미니안 주의에 대항한 것이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9. 1993)



이 부흥운동은 첫째로 불신앙 사상을 물리쳤고, 둘째는 각 교회가 영적으로 소생케 하였고, 셋째로는 박애사업과 교육사업과 선교사업에 열이 일어나게 하였다.(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5. 1995)







마. 제 2차 대각성 운동




이 운동은 18세기말부터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해서 강력히 일어났던 부흥운동으로 주로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이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9. 1993)




이 운동은 교회 일치의 한 운동이었다. 그로 인하여 ‘장로회(Presbytational presbyterian church)\\\\\\\' 교회가 세워졌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9. 1993)



이 부흥운동에서 출중하게 서있는 사람이었던 장로교의 목사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 1792-1875)는 신학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으로 부흥회를 새 방법으로 이끌었다. 그로 인하여 1857년-1858년에 전국적으로 매일 기도회, 평신도의 교회지도가 특수하였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0. 1993)



이때에 신앙부흥은 매우 조용하고 점차적이었다. 그리고 많은 교회의 회원을 증가시켰다. 이 부흥운동의 뚜렷한 국면은 대학생들의 선교열이 고조(高調)된 일이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0. 1993) *고조(高調; 크게 감흥을 일으키는 일)







바. 19세기말의 부흥운동




19세기말의 두드러진 부흥운동은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에 의해 일어났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1. 1993)

무디는 그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언어(言語)는 단순하였고, 그의 정신은 따뜻하고 성실(誠實)하였므로 많은 사람을 이끌었다.

무디는 성악가 생키와 함께 동역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무디는 외국선교에 부흥운동을 통하여 큰 공헌을 하였고, 외국 선교자원, 학생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고, 선교를 위한 무디 성서학원 설립을 하였다. 무디의 부흥운동은 선교 지향적인 특색을 지녔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2. 1993)




또 19세기 영국의 다른 교회들은 침체에 빠질 때에, 감리교회에서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국내외선교에 잠을 깨웠으며, 주일 학교(Sunday School Work)와 성경 유포와 종교문학(Religious Literature)과 여러가지 자선 사업에서도 눈을 뜬것이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2.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