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사연수원

CYBER SCHOOL OF THEOLOGY

부흥사연수원

제목해방 이후의 부흥운동 2022-07-01 15:08
작성자 Level 10

해방 이후의 부흥운동




1. 교회 재건운동




8. 15 해방으로 이제까지 신앙의 자유를 상실하였던 우리 민족은 다시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것이며, 국가의 주권상실이 가져다주는 비극의 참상을 깨닫게 되었으며, 국가의 재건이라는 대명제 앞에 서게 되었다.

일제 최후의 발악이라고 할 수 있는 말살정책의 한 방법으로 채택되었던 소위 “신사참배”로 인한 일대 시련과 박해 속에서 어떤 이들은 친일적인 성격을 표명하여 이 박해를 모면한 교계인사들도 있지만, 감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하고 또는 산으로 숨어서 그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가, 북한에서의 교회 재건운동과 수난




교회재건 운동은 전국에서 지체 없이 시작되었다. 신자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도생하던 70여 명 중, 주 기철 목사나 채 정민 목사를 비롯한 50여명은 감옥에서 순교했고, 나머지 20여명은 출옥됐다.

종교는 압박과 그 피해에서 신경을 날카롭게 하여 열정과 신앙의 예민으로 해서, 전혀 상상도 못하는 곳으로 경건과 순교의 영광을 다짐하게 된다. 이들은 “출옥성도”로 자칭했다. 그리고 이들의 영광된 수난과 그 순교정신은 기성교회의 현실 타협적 존속에 반발했고, 따라서 은총의 개념이 막연해진 채 ,도덕적 순결과 신앙의 의지적 보수라는 인효(仁孝)론적 화살로 그 참회의 상징을 요구했다. 교회는 우선 양심의 숙연한 비판에 떨었다.

출옥한 20여명 교역자들은 8월 17일에 출옥하자마자 자신들의 그리운 가정에 돌아가는 것도 뒤로하고, 옥중 순교한 주 기철 목사가 시무 하던 산정현교회로 모여 2개월간 합심기도를 하였다. 출옥성도들은 신사 참배한 한국교회를 위한 통회와 함께 속죄의 기도를 올렸으며 또한 앞으로의 한국교회 재건에 관한 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첫째, 신사에 참배한 교회의 지도자(목사와 장로)들은 모두 권징의 길을 택하여 통회 자복한 후 교역에 나서야한다.

둘째,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하여야 한다.

셋째, 목사나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넷째, 위의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 각 노회와 지교회는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

다섯째,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시급히 복구 재건할 것 등이 었다.



1945년 12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북한 5도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평양노회가 중심이 되어 평북의 여섯 노회 즉 평동, 평북, 용천, 의산, 산서, 삼산노회 등과 합의 한 후에, 북한에 산재하고 있는 5도의 16 노회에게 모두 연락을 취하여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연합노회 조직을 위한 회합을 보게 된 것이다.

5도 연합노회가 결의한 중요 안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북한 5도 연합노회는 남북통일이 완성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하는 잠정적 협의기관으로 한다.

둘째, 회의 헌법은 개정 이전의 것으로 하되 남북통일 총회가 열릴 때까지 그대로 사용한다.

셋째, 전 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자숙할 것을 원칙으로 한다.

넷째, 신학교 운영은 연합노회 직영으로 한다.

다섯째, 조국의 기독교회를 목표로 독립기념 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 교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여섯째, 북한교회를 대표한 사절단을 연합군 사령관에게 파견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이 기관의 구체적 행동에 경계를 하게 되었다. 더구나 기독교 사회민주당과 같은 정당이 출연하고, 신의주 학생의 봉기가 있자 교회의 세력을 부르조와의 잔재 요소로 간주하고 그 근절을 계획하게 되었다.

1946년 11월 28일에는 기독교도 연맹을 조직하여 왕년의 부흥사 김 익두 목사와 산동성 선교사로 갔던 박 상순 목사를 감언(甘言) 공갈(恐喝)로 가맹시킨 다음, 교회를 공산주의 선전에 악용하며 교회의 이름으로 남한을 공격하고, 김 일성을 절대 지지하여 선거에 솔선수범한다는 해괴한 결의문까지 발표하게 했다.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은 투옥과 추방으로 위협하였다.

신학교도 공산당의 손에 의해 강제 통합되었다, 1946년 9월 창립한 감리교의 성화신학교와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에는 각각 600여명의 학생들이 등록하고 있었다. 1949년 연말이 가까워 오면서 북괴정권은 기독교도 연맹을 시켜서 어용신학교로서 기독교 신학교란 것을 개교하게 하였다.

북한에서의 기독인의 수난은 김 화식이 기독교 자유당 조직 활동으로 1947년 11월 피체(被逮)된 얼마 후, 순교한 때로부터 비롯되어 오늘에 이른다. 같은 해 1947년 에는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 인준이 소련군에 의해 순교했고, 이 정심 역시 그해 12월 8일 소련군의 고문으로 순교의 길에 올랐다. 그 뒤를 김 철훈, 이 유택이 따랐다.




나. 남한에서의 재건운동




남한에 있는 교회들은 미군의 진주 때문에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비록 일제가 설정 강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교파의 합동으로 된 교단의 존속을 그대로 계속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는 감리교의 변 홍규, 이 규갑을 비롯하여 박 연서 목사들이 장로교의 김 관식, 송 창근, 김 영주등 여러 목사와 동참해서 그 존속을 의논했다. 이것은 북한 지역의 교회 재건운동과는 그 성질에서나 의도에서 전혀 판이한 종류의 것이었다.

교단 지도자들은 끝까기 건국과 교회와의 불가분리의 관계를 역설하면서 교단 존속의 방향으로 여론을 유도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밀려났던 변 홍규, 이 규갑과 같은 인물들이 호응할 까닭이 없었고, 여기에 합세한 수십 명 감리교 목사들은 감리교는 새로이 재건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퇴장하고 말았다.




1) 감리교회 재건운동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교단대회에서 대회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퇴장한 이 규갑, 변 홍규 등은 곧 바로 동대문교회로 가서 감리교의 재건을 주장하여 재건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대회의 위원장으로 이 규갑 목사를 추대하였고 동부, 충부, 서부의 세 연회를 조직하여 동부연회는 변 홍규 목사에게, 서부연회는 이 유용 목사에게 각각 회장을 맡기고, 이로써 감리교회가 재건되었다고 국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진행은 여의치 않았다. 여기 호응하는 교회의 수가 그 과격성 때문에 많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6년 1월 감리교 신학교를 재건, 설립하고 변 홍규 목사가 교장에 취임했을 때에도 전국 교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재건파에 반대한 이들을 부흥측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1946년 4월 7일 강 태희 목사를 중심으로 수표교회에서 기독교 조선감리회 부흥 신도대회를 열었다.

부흥 측에서는 1946년 9월 기독교 조선감리회의 “부흥”됨을 선언하고 감독에 강 태희를 선출하였던 것이다. 재건파에서 장 석영을 감독으로 기독교 조선감리회를 조직한 것은 1948년 1월 23일이었다. “조선감리회의 역사적 신성을 유지하고자” 함이 그 목적이었다.




2) 장로교의 재건운동

장로회에 있어서 남한지역에서 가장 먼저 교회 재건을 위해 일어난 곳은 부산을 중심한 경상남도 일원이었다. 이는 순교자 주 기철 목사나 최 상림 목사 그리고 출옥성도라고 일컬어지는 손 양원 목사, 주 남선 목사, 한 상동 목사 같은 분들이 다 경남 사람으로 다년간 그곳에서 목회한 영향이 적지 않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1945년 11월 3일에는 제 47회 경남노회를 개최하여 재건노회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결정된 중요한 안건은 현역 교역다들에 대한 자숙이 강조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첫째로 목사, 전도사, 장로등은 일제히 자숙하는 행동을 취하기로 하되 일단은 교회를 사면해야 하며, 둘째는 자숙기간이 끝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 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 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역 교역자들은 자숙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암암리에 폐기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얼마 후 이를 자각한 노회원들은 제47회 정기노회가 모이자 사태의 책임을 묻고 임원직의 총사퇴를 요구하였으며, 출옥 성도 주 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추대하고 교회재건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1946년 6원 12일부터 4일간 서울 승동교회에서 소위 남부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는 북한의 교회가 포함되지 아니한 남한교회만의 총회였기 때문에, 남부총회라고 이름하였다. 남부 총회는 재야 교역자인 배 은희 목사를 회장으로 했고, 함 태영 목사를 부회장으로 하여 총회를 소집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주도권이 일제시대의 교단 자도자들의 손에서 떠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이들은 실제로 교회 목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교회 주도권의 변화에는 영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남부총회가 결의한 중요 안건은, 첫째로 헌법은 남북통일 될 때까지 그대로 사용할 것과, 둘째로 제27회 총회에서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취소되어야 하며, 셋째로는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의 직영 신학교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3)성결교의 재건운동

1945년 9월 10일부터 역사적인 재건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때까지 과거 헌법에 의하여 개회됨에 의장 천 세광 목사, 부의장 김 유연 목사가 추대되었다. 이 때 총회원 70여 명이 모인 중에 북한 대표로서 이 성봉, 조 기함, 조 한수, 이 용선, 최 학철 제씨가 38선을 넘어 참석하였다.

개회 벽두에 각 지방 대표들의 교회 재건보고로부터 시작하여 흐뭇하고 만족한 분위기 속에서 의사가 진행되었다. 이 때 중요한 의제로서는 신학교 개교 문제와 《활천》 복간건 및 각 기관 부활과 부흥 대책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승리중에 폐회하였다.

첫째, 교회 명칭 변경문제: 성결교회는 개창시는 복음전도관이라 했고, 1922년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개칭하였으나, 해방과 동시에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부르게 되었고, 동양선교회는 선교기관이므로 성결교회와 횡적 관계뿐이며, 독립 한국에 자주교회이니 그 명칭을 고치기로 하고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하였다.

둘째, 신학교 개교: 신학교를 개교함에 있어서 1940년 경성신학교로 인가 받은 이후 폐교함에 이르렀으니 행방된 오늘에 수도가 “경성”에서 “서울”로 개칭됨에 따라 자연적으로 “서울신학교”로 변경했다. 체제를 쇄신하기 위하여 교장에 이 건 목사를 선임했고, 이 명직 목사를 명예교장으로 추대하고 교수를 박 현명, 김 유연, 김 응조, 김 감, 최 석모, 학교유지 총무 박 형규, 서무 한 영환 제씨가 담당하게 되었고, 학생은 60~70명으로 개교하게 되었다.

셋째, 《활천》복간

넷째, 신생부인회 조직

이와 같이 재건총회에서 거대한 의결을 하는 동시에 모든 진용을 쇄신하여 신생 대한민국에 신생교회로서 출발하게 되었으니 성결교회의 앞날은 양양하게 되었다.

총회 본부를 신학교 안에 두고 젊은 새 총리 박 현명 목사 영도아래 황 성택 목사가 총무로 선임되어 교회 재건에 진력하게 되었다.










2. 6.25의 상처와 교회 부흥운동




가. 6.25로 인한 교회의 피해




6.25의 전란을 겪으면서 받은 국민 전체의 손실과 참회는 컸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받은 비극의 깊이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준엄히 공산당에 대항하던 목사들은 남부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으며, 여순반란때 두 아들을 죽인 적구의 조소를 받으면서까지 용서해 주었던, 성인 손 양원 목사와 저명한 부흥목사 김 익두 목사의 순교, 구세근, 노 영수, 감리교의 송 정근, 1930년대 농촌 사업의 기수였던 조 민형과 신 석구, 장로교의 박 경구, 정 일선이 순교, 그리고 남 궁혁, 양 주삼, 송 창근, 박 현명 제목사와 신학자들이 납치되어 해방이 묘연하게 되었다. 이 사변을 통해 파손, 손실된 교회의 수는 장로교가 152교회, 감리교가 84교회, 성결교가 27교회 그리고 구세군이 4교회, 기타 교파에서도 그 손해는 막심했다. 순교, 납치 당한 이는 장로교에 177명, 감리교에 44명, 성결교에 11명이었다. 그러나 이 통계는 교회가 그 뿌리에서부터 받은 아픔과 고난을 표명할 수는 없었다.

이 사변이 교회에 준 비통한 상처는 사실 이런 외관적인 침해가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파생한 본질 반역의 기구한 파탄과 자학의 돌이킬 수 없는 수치가 실질상의 피해였다.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의 선무공작이 활발해지자 저들에게도 동조하여 교회를 괴롭히는 분자들이 일어났음은 일대 유감이었다.

7월 10일경에 경동교회에 다녔다는 김 욱이란 자가 종로 네거리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YMCA회관에 기독교 민주동맹이란 간판을 내걸고 김 일성 입경 환영대회를 개최한다면서 대대적으로 떠들어댔다. 그는 각 교회별 기독교 민주동맹지회를 결성해야 한다면서 교역자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보다 더 심각하기는 전직 목사였다는 최 문식의 소행이었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며 일찍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감염되어 1946년 대구 철도파업사건에 주도 역할을 하여 종신형으로 복역 중에 있었다. 그러다가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감옥에서 뛰쳐나와 7월 중순부터 거리를 쏘다니며 날뛰기 시작하였다. 그는 종로의 기독교서회 건물을 접수하여 사무실을 차려놓고 미처 남하하지 못한 교역자들을 색출하는 일에 광분하였다. 북괴정권을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개최해야 한다느니, 남북통일의 호소문을 작성해야 한다면서 교역자들의 서명날인을 강요하였다. 그런데 9원 21일 궐기대회가 전혀 기운 없이 진행되자 화가 치민 그는 교역자들을 향해 협조를 거부한 반동분자라는 구실을 내세워 발견되는 대로 공산군에 체포 연행하게 했다.

1953년 종전 이후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1959년까지는 전쟁으로 파괴된 교회들이 거의 복구되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저명한 인물들은 납치 당하거나 순교 당했기 때문에 교회는 지도자들의 결핍에 빠졌다. 교회지도자 결핍으로 일어난 일들이 바로 이단종파운동이었다.




나. 이단종파 운동들

6.25와 그 후유증 때문에 시달리는 교회에 열광적이요 종말론적인 내면화의 경건이 여기저기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상 유래없는 참화를 입은 민중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벅찬 현실이 끝없이 이어져가는 것 같은 허탈이 엄습했고, 거기서 솟구친 서민층의 자욱한 절망감은 교회의 건전하고도 선량한 신앙과 윤리의 부재에 의해서 절실한 종말의식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 교회와 교리에의 냉대에서 시작하여 그 “악마성”을 공격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사회에서의 개인적 내지는 집단적 격리로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의 특징은, 철저하게 내세적이요 현실 부정적이면서도 가혹할 정도로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생태에 접속하게 되어 있어서 축복과 열락의 상징인 내세의 천국이 여기, 이 땅에서 그 종말의 아련한 대망의 자리에 물리적으로 체험 가능하게 이르기를 줄기차게 갈망하는데 있었다.


(1)나 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나운동은 6.25전란 때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죽을 뻔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이 있어 이를 계기로 오직 하나님께 온몸을 다 맡기게 되었으며, 수도생활을 통하여 입신, 방언, 예언, 진동, 신유 등의 온갖 신비 체험을 다 맛보게 되었다. 나 장로의 기도와 능력 있는 설교는 많은 병자를 고쳤고, 여러 사람들에게 입신과 방언의 은사를 주기도 하였다.

1954년 이른바 양칠년 창립기념집회를 계기로 나 장로는 본격적인 부흥운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의 부흥운동은 점차 기드온 운동으로 틀 잡혀가기 시작하였으며, 1955년 기드온 성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기드온 신학교와 수도원을 세워 교역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신학을 전공한 바 없으나 기독교 도리학을 통하여 자신의 교리 주장을 집약하였다. 일곱 편으로 된 이 책은 신론, 경륜론, 인생론, 기독론, 성신론, 말세론을 차례로 다루고 있으며, 교회론이 빠져 있다. 그는 공자, 석가가 동방의 성자이며 유,불교가 기독교 복음 안에 조화되는 것이, 진리는 형에 있지 않고 질에 있으니, 진리이면 유교나 불교, 기독교가 다 하나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195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1회 총회는 “박 태선, 나 운몽, 엄 애경, 노 광공 등 비성서적 교훈을 가르치고 교회 질서를 무란케 하는 자의 집회를 불허하고 엄단한다”하고 결의하였으며, 성결교회에서는 1956년 4월에 모인 총회에서 “통일교 박 태선, 나 운몽, 노 광공, 여호와의 증인 엄 애경, 백 권사, 입신파, 방언파를 이단 사설로 규정하고 참가자는 처벌한다”라고 결의하였다.

감리교는 1962년 10월 총리원에서 열린 연합감리사 회의에서, “나 운몽, 백 시응 등 건덕에 해로은 자들을 초빙하지 못하도록 하되 이를 위반하는 교역자는 심사에 부치기로 한다”라고 하였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67년 5월 9일 서울노회에서, 고려파 장로회는 1968년 7월 22일 경북노회에서 “나씨 집단”을 이단으로 취급하기로 규정하였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114. 1993)




(2) 박 태선의 전도관 운동

박태선 장로의 철저한 섹트(sect)적 사회윤리의 감람나무교회(천년성), 곧 “한국예수교 전도관 부흥협회”는 사변 후의 교계와 일반 민중 사이에 불길처럼 확대해 갔다, 1955년 3월 하순 남산 광장에서 김 현준 목사와 미국의 스완스 부흥사를 초빙하여 함께 대대적인 연일연속의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박 태선은 기성교회는 죄로 썩었으므로 은혜가 말라 없어졌으니 자신의 안찰 기도를 받고 생명수를 마시고 천년성 신앙촌으로 들어와야 구원을 얻는다고 절규하였다.

그를 향해 동방의 의인(이사야41:2,25),이라고 부르며, “감람나무”(계시록11:4, 슥4:3-14), 또 는 보혜사 심지어는 영모라는 말로 호칭하면서 숭배했으며. 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은 14만 4천명이 천년왕국에 들어가 왕노릇하게 되는데 그 중의 14만명은 이미 순교한 수가되어 있고, 나머지 4천명은 소사에 있는 소래산이 예수가 재림할 산이니 그곳 신앙촌 천년성에 들어가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한 모양으로 기성교회 신도들을 유혹하여서 수많은 가정을 파괴하였고 이혼으로 부부가 생이별하게 만들었으며, 헌금이라는 미명으로 신도들의 가산을 긁어모아 마침내는 사회문제화하기까지 이르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는 1955년 7월에 박태선 집단을 사이비 교파라고 규정하였다. 1956년 6월에는 전국 지방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각 교회가 뜻을 모아 박 태선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단이라고 성토하였다. 1957년 10월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회를 선두로 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 대한감리회,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기독교 대한구세군의 전국 굴지의 교단들이 단합하여 박 태선과 그의 전도관 활동의 비법과 이단성을 폭로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순진한 교인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하였다.




(3) 문 선명의 통일교 포교

문선명은 그의 환상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1954년 5월 1일 유호원의 도움으로 통일교를 창시하게 되었으며, 그 원명은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협회”(The Holt Spirit Association for the Unification of World Christianity)이다.

통일교의 최대 목표는 그 이름이 말하는 대로 세계의 모든 종교, 사상, 정치제도까지도 교주 문 선명을 중심으로 통일하여 지상왕국을 건설하는데 있다.

예수는 영에는 성공하였으나 육에 실패하였으니 불완전한 구세주라는 것이며, 문 선명은 영육이 아울러 성공한 완전 구세주로서 능히 세계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일교는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하와와 사단과의 관계가 성적 교통이었으니 만큼, 그때의 정화가 윤리에서의 구속과 같다고 본다. 따라서 이 피의 순결이 횡적으로 한국에서 비롯 전 세계에 미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가족적인 이미지로써의 순혈의 전수 과정을 종교적 의례로 승화, 변성해서 합동결혼을 집행하게 된 것이다,

통일교가 반 기독교적이며, 분파적 생리에 서 있다는 사실이 셋 있다. 하나는 십자가 공로의 부인이다. 그것은 성사된 사실이 아니고 간단히 말해서 옛날에 끝난 사건이다. 예수는 할 일을 다 못 이루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누군가가 다시 와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교훈이 사뭇 경험적이다. 셋째로, 통일교는 일관된 신비주의 사상이다.







다. 교회 내의 건전한 부흥운동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로부터 선망의 적이 되어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열띤 신앙부흥운동의 성행이라 하겠다. 6. 25 전란으로 교회의 유형적 소유를 송두리째 상실하게 된 한국 교인들은 물질보다 먼저 신앙의 부흥부터 초래되기를 간절히 희구하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은 그대로 응답을 받아, 심령의 큰 부흥을 맞은 한국 교인들은 방방곡곡에 수많은 교회당을 복구 건립하였고, 그 어디에 가나 은혜 받은 교인들이 차고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전쟁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는 1952년 이 해를 “신도 전도 총동원의 해”로 결정하였다. 신도들은 부흥에 호응하여 모두가 총궐기하여 1월부터 3월까지 개인의 신앙 부흥을 위하여, 4월부터 5월까지는 개인 전도를 하여 이웃에게 성과를 올리기로 했고, 6월부터 8월까지는 집단전도로, 9월부터 12월까지는 교회의 전체적인 부흥을 위하여 성과를 올리기로 했다. 과연 이 4단계 전도운동은 적중하여 상당한 부흥을 가져왔다.



감리교에서는 1953년이 웨슬리(John Wesley) 기념 250주년을 맞는 해였으므로 특별히 부흥 전도의 해로 작정하였고, 부흥의 기세를 크게 드높였다. 그리고 1954년이야말로 장로회나 감리교에 있어서 미국교회로부터 선교를 받은 70주년에 해당하는 해였으므로 이를 기회로 하여 기념사업으로는 무교회 면에 5백교회 설립 운동을, 감리교에서는 1백처 교회 신설운동을 과감하게 전개하여 그 나름대로의 결실을 거둔 바 있었다.



성결교회에서도 1952년 3월에 “춘계대부흥 전도운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교세의 부흥을 초래하였다.

한편 세계적 대부흥사인 밥 피어스(Bob Pierce)와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목사와 같은 인사들이 잇달아 한국을 방문하여 대전도집회를 개최하였음은 한국 교회의 신앙 부흥운동을 위하여 큰 고무제가 되었다.

피어스 목사는 6. 25 전란에 내한하여 초우의 대부흥을 일으킨 것을 필두로 하여 전후 다섯 차례나 찾아와 대부흥집회를 열었다. 특히 1955년에는 자신이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고 서울, 대구, 부산 등 주요도시를 편력하여 대부흥회를 개최하여 수만 명의 결신자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6. 25 전란 중인 1952년 12월 15일과 또 1956년 2월에도 내한하여 부산과 서울에서 각기 전도 강연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수많은 결신자를 거두는 성과를 올렸다.







3. 새로운 교회 부흥운동



1960년대는 우리나라가 정치 사회적인 과도기에서 조국 근대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1960년 4월 19일에 자유당 말기 부정부패의 정권이 붕괴되고, 4. 19의거 13개월만인 1961년 5월 16일에는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교회는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해야 했고,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이 땅의 구석구석까지 뿌려야 했다.




가, 1960년대의 민족복음화 운동



1964년에 김 활란의 발기로 구성된 초교파적인 한국 복음화 운동추진회가 있었다. 여기에는 한 경직, 홍 현설 목사를 중심으로 N.C.C.가 입교단은 물론 보수측 교단과 천주교회까지 대거 참여하여 전국적인 복음화운동이 비롯되었다,

이 운동의 필요에 대하여 홍 현설 박사는 다음과 같이 필설 하였다. “전국 복음화운동은 진실된 기독자라면 누구든지 오늘의 조국의 암담하고 절박한 현실 아래서 이런 종류의 긴급한 전도운동의 필요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욱이 지나간 해의 언론 윤리위원회법을 둘러싼 언론 파동과, 갑자기 열을 올렸던 남북통일론의 대두는 식자들의 불안과 염려를 자아낸 커다란 쇼크였었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의식이 저미(低迷)하는 중에서 지금이야말로 복음으로써만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굳은 신념에서 어느 누가 맨 처음으로 발설했는지를 알아볼 필요도 없이 이심전심으로 이런 생각들이 모여 구체화하게 된 것이 전국 복음화 운동이다. 아무리 모든 종류의 교회 연합운동을 반대하는 극단적인 태도로 나아가는 교파가 있다손 치더라도 설마 이 운동이야 반대하랴 하는 신념에서 시작한 것이다.



이 운동은 어떤 제도적인 초교파운동이 아니며, 따라서 항구적인 조직체가 아니고 하나의 위원회로서 1965년 일 년간 전개할 운동임을 말하고 있다.

이 운동은 기발하고 참신한 새로운 전도 방법을 들고나 온 것은 아니다. 그랬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방법은 우리가 이미 시험해 보고 활용해 본 것들이다.

다만 이번에 이 운동에서는 지금까지의 재래식 전도방법 대로 입으로만 전도하는 방법(Oral Method)에다가 최근에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는 매스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우리의 복음 전달방법을 모다 효율적으로, 보다 광범위하게 미치도록 하자는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 운동에 가담하는 각 교파는 각기 자기 교파의 특색을 살려서 그들의 신년 계획을 이 운동으로 발전적으로 통합 실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예를 들면 구세군은 노방전도로, 감리교회는 속회를 통해서, 성공회는 그 장엄한 예배를 통해서, 장로교, 성결교회는 부흥전도집회나 사경회를 통해서 어떻게든지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는”(고전 9:12) 일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기대한다.

이 민족복음화 운동은 1965년 11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대규모 부흥집회를 개최하므로 써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대규모 부흥집회 이외에도 1960년대 이후의 한국 교회는 개교회마다 연례적으로 부흥강사를 초빙한 부흥회를 개최했다. 이를 통한 교세의 확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성령운동으로 폭발적인 교세 확장을 이루었다.






나. 1970년대의 대규모 부흥운동



1960년대의 부흥운동의 결과로 1970년 초부터 교회는 급진적 성장을 보이게 되었다. 70년대 부흥운동이 활발해지자 한 경직 목사를 대회장으로 한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가 1973년에 개최되었다. 이 전도대회에 대회장으로 있었던 한 경직 목사는 그의 개회인사 말로 밝혔듯이, 이 대회의 목적은 오직 하나 “5000만을 복음화시키는 것”이라고 밝혔으며, 교파를 초월한 대중전도 부흥회라고 그 성격도 말했다.

이때의 전도의 양상을 보면 1973년 5월 16-27일간은 부산, 춘천, 대전, 전주, 광주, 대구 등지에서 예비 지방전도대회를 갖고, 서울대회는 5월 30일부터 6월 3일에 걸쳐 여의도 5. 16 광장에서 열렸는데 대회 첫날 5월 30일 밤에는 51만 여명 참석하였고, 6월 3일 주일 노후에는 115만 여명이 모여 이 대회에 연인원 334만 명이 모였고, 결신자 수는 대회기간에 4만 4천여명이며, 성가대로 동원된 인원이 4만 2천명이었으며, 대회에서만 수집된 헌금은 3천여만원이나 되었다.

그리고 지방대회에서는 부산, 대구, 대전, 전주, 광주, 춘천, 제주, 수원, 인천 등지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동원된 연인원은 1백 36만 명이었고, 결신자 수는 3만 7천여명, 헌금은 330만원으로 집계되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총동원된 연인원은 4,711,588명에 결신자 수는 81,842명. 그리고 수금된 헌금은 33,813,191원이었다.

1974년에는 국제대학생선교회의 후원 아래 한국대학생선교회에 의하여 주도된 세계적인 대전도부흥회인 엑스폴로 ’74(EXPLO \\\'74)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새벽기도회, 낮 공부(전도요원 훈련), 저녁집회, 철야기도회 등으로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연인원 6백 50여만 성도가 운집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예수 혁명”, “성령 폭팔”이란 표어를 내 걸고 초대교회 사도행전의 사람들처럼 변화 받고 한꺼번에 3천 명, 5천 명씩 구원시키는 폭발적인 사건을 기대하면서 베풀어진 동 대회의 대회장 김준곤 목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령의 언어와 설교가 과잉 상태이면서도 신화나 사화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성령은 충만히 받아야 한다면서 이 “성령을 받는 방법은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 대회는 사도행전의 연장처럼 기도폭발, 말씀폭발, 사랑폭발, 전도폭발의 역사로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고 했다. 이 대회로 국내 결신자 수는 27만 여명이며, 외국인 결신자 수는 1,192명이고, 교인 동원수 1974년 8월 13일 밤 75만, 14일에 136만, 15일에 68만, 16일에 153만, 17일에 158만, 철야기도회만 연인원 143만 명이며 성가대로 동원된 연인원이 9만 명이었다고 보고 되었다.

이제까지의 전도 부흥집회가 모두 외국 자본에 의해서 외국인 강사에 의해서 주도되어 온 것에 대한 민족적인 자각과 함께 순수한 우리 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1907년 평양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70주년을 기념하면서 민족적인 대부흥운동을 열기로 부흥사들이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가칭 ’77년 “민족복음화 성회 발기회”로 이름을 내걸고 ’74년 11월부터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등 12개 대도시에 월 1차씩 연합성회를 성공리에 마쳤다. 이때 내건 표어는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