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 -The Religious Affections 중심으로-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카톨릭교회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신학교와 교회마다 영성이나 영성신학과 영성훈련에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부류에서는 영성을 정신성과 혼동을 하고 있고, 또 다른 부류에서는 신비한 체험과 혼동하고 있으며, 참된 영성과 거짓된 영성간에 구분이 안되어 있다. 그래서 기독교 교회사적으로 정평이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서문강 역(지평서원, 1994). (The Religious Affections)를 중심으로 참된 영성의 두드러진 표증들을 거짓된 경우와 대조하여 살피게 되면 성경적으로 건전한 영성이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A. 참 종교의 정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인간은 전도서가 밝히 말하고 있는대로 그 마음이 허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이 제멋대로 하고 싶은대로 사는 인간은 허무의 바다에서 표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허무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앎으로서 가슴이 벅차 오르는 신앙 뿐이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도록 우리가 부르심 받았는가를 묻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감동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깊이 체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감사하며 거룩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순종의 원동력인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들고 갇힌 자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바 사랑의 실천을 결과시킨다. 그리고 이 복음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발휘되는 것이다. 참 종교의 핵심 정서(master affection)는 사랑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하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 영적 지식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참된 변화를 경험하며, 예수의 온유한 마음을 배우고, 하나님께 날마다 가까이 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덕을 베푸는데 열심도 내야 하는 것이다. James M. Houston ed., Religious Affections (Mineapolis : Bethany House Publishers, 1996)에서 Houston의 편집자 노트와 Charles W. Colson의 서문을 참조하였다.
1. 성경에 나타난 종교적 정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사도 베드로의 이 말씀은 믿음의 시련을 극렬하게 겪으며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근심할 수 밖에 없는 형편에 있는 성도들에게 한 말씀이다. 믿음의 시련은 거짓 종교로부터 참 종교를 구별시켜주고 참종교의 진리가 드러나게하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뿐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어도 영적으로 믿은 까닭에 예수를 사랑하게 되고 외적인 육체적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큰 기쁨을 얻게 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으므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리스도를 원망해야 할 것 같으나, 오히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가득찬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렇듯 참종교에는 큰 환란과 핍박과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love to Christ)과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기쁨(joy in Christ) 등 거룩하고 은혜로운 종교적 정서가 있다. 이 종교적 정서는 우리 영혼의 성향과 의지가 성령의 감동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보다 더 힘차게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감정적 표현이다(the more vigorous and practical exercises of the inclination and will of the soul). 조나단 에즈워드, 상게서, pp. 21-26.
이 종교적 정서에는 열심(fervent in spirit) 또는 열정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되 마음과 힘과 성품을 다하여 열심을 품고 섬기지 아니하면(신 6:4, 5 ; 10:12 ; 롬 12:11 ; 마 22:37) 우리의 의지와 성향이 제대로 표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이 없는 종교적 정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상게서, pp. 30-31. 열심을 품고 힘을 다하여 온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여 그를 사랑하고 즐거워해야 그것이 참된 중생의 증거이며, 경건의 능력인 것이다. 열심이 없는 신앙, 미지근한 상태의 종교는 미숙한 것이든지 아니면 괴이하거나 거짓된 것이기 쉽다. 경건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 속에서 성령은 강렬하고 거룩한 정서를 주신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다(눅 24:32, 참고, 딤후 1:7). 그러기에 종교적 열심과 같은 정서가 없으면 신앙의 활동이 멈추게 되고 만다. 즉, 종교적 정서가 없이 교리적인 지식이나 관념적 사변적 생각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종교의 일에 결코 참여하지 않는다. 상게서, p. 33. 그리고 마음이나 행실에 변화도 없고 자기의 구원을 추구하려고 애쓰지 않으며 열심을 품고 기도하는 일도 힘써 하지 않는다. 마음에 감동이 없는 사람은 그의 삶에 아무것도 사실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소개하는바 성경에 나타나 있는 종교적 정서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상게서, pp. 35-44 ; 참조, Jonathan Edwards, The Religious Affections (Edinburgh ;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4), pp. 31-37. 첫째, 여호와에 대한 경외(godly fear)이다. 참으로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떨며,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몸도 떨며,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위엄을 인하여 그를 경외하는 것이다. 이 경외는 소망과 함께 있다. 소망이 없는 경외는 성도들로 하여금 절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소망하는) 자를 살피사”(시 33:18)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인자하심을 소망하는 자이다(참고, 시 147:11).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고(시 146:5)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시 31:24). 그리고 이 소망은 사랑과 함께 있다(고전 13:13). 둘째, 죄와 악에 대한 미움(증오)도 종교적 정서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악을 미워한다(잠 8:13, 시 97:10, 119:104). 미움이라는 감정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죄이지만, 죄를 미워하는 정서는 중요한 종교적 정서인 것이다. 셋째,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갈망(longings, hungerings, and thirstings after God and holiness)이다.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참고, 사 26:8, 시 42:1-2, 63:1-2, 84:1-2). 넷째, 거룩한 기쁨(holy joy)이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시 97:12)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3:1, 4:4, 살전 5:16). 성령의 열매 가운데도 희락이 있다(갈 5:22). 다섯째, 종교적인 슬픔이나 상한 마음(religious sorrow, mourning, and brokenness of heart)이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참고, 사 61:1-2, 마 5:4).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참고, 사 57:15, 66:2). 여섯째, 감사하는 마음(gratitude)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살전 5:18)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하기에 여호와께 감사함이 마땅하다(시 117:1-2, 118:1).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하나님의 본질에 속할 뿐 아니라 창조사역과 구원 사역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는 까닭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참고, 시 136편). 일곱째, 긍휼 또는 인애(compassion or mercy)이다. “의인은 은혜(긍휼)를 베풀고 주는도다”(시 37:21)(참조, 시 37:26, 잠 14:31).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7).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 6:6). 여덟째, 열심(zeal)이다. 열심은 참된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정서이다. 이 열심은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기대하신 정서이기도 하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그래서 열심이 부족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크게 책망하신 바 있다(계 3:15, 16, 19). 아홉째, 참된 종교의 원천되는 정서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모든 정서들 중의 으뜸이요, 다른 정서들의 원천이다(the chief of the affections and fountain of all other affections). 어떤 율법사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묻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이 주신 대답에 보면, 첫째는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22:37-40). 이 점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4). 이렇듯 사랑은 종교의 진수요 영혼의 생명의 요소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모든 은혜로운 정서들을 내는 원천이다. 이 사랑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기뻐하고,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을 때는 슬퍼하며, 내세를 기대할 때 소망을 가지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열렬한 열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윗의 시편에 이러한 정서들이 잘 집합되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2. 바울의 정서 성경적 정서가 가장 탁월한 모델로는 구약에서는 다윗이요, 신약에서는 바울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고 그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미쳤다고 사람들이 내놓을 정도였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3-15). 바울은 이처럼 무엇보다 영광스런 주님께 대해 열정적 사랑으로 가슴이 뜨겁고 벅차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들에 대해 사랑이 넘쳤다. 그것은 정감 어린 부드러운 사랑이요(살전 2:7, 8) 애끓는 사랑이며(빌 1:8, 몬 12, 20), 진실하게 보살피는 사랑이요(고후 8:16), 근심하는 사랑이다(고후 9:2, 11:28). 그리고 깊이 생각하는 사랑이다(고후 12:19). 바울에게는 하나님과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과 성도와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환난과 핍박과 고통 중에도 늘 기쁨이 넘쳤다(고후 1:12, 7:13, 빌 3:3, 4:10, 살후 1:4). 또한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자기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랄 뿐 아니라,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있었다(빌 1:20-23). 그는 경건한 열심의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바울은 넘치는 사랑으로 인하여 성도들과 교회를 위하여 근심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후 2:4, 행 20:19, 31). 그는 주님께 대한 헌신적 사랑 때문에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려 갈 정도로 철저하게 순종하였으며(행 23:11, 25:10-12) 그는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것과 몸까지도 다 내어줄 만큼 순종의 사람이었다(참조, 행 20:24). 사랑과 눈물의 사람 바울은 정서적으로 또한 온유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 바울은 불의를 당하고 속는다 해도 참고 세상 법정에 소송을 걸지 아니했다(고전 6:6-7).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아내와 함께 동거하면서 사역을 해도 자기는 혼자서 사는 것을 잘 감당했다(고전 9:4-5). 그는 온유의 사람인지라 자기의 유익 대신 남의 유익을 먼저 구했다(고전 10:24). 그리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온유하라고 강조했다(딤전 6:11, 딤후 2:24). 또한 바울에게는 겸손(고전 2:2, 3 ; 4:9-13 ; 딤전 1:15)과, 인내(딤후 4:7, 고후 11:23-27 ; 12:12)와 담대함(행 28:31)이 있었다. 주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면 겸손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담대함으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B. 참된 종교적 정서의 거짓된 표증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pp. 68-161.
1. 강렬한 정서 종교적 정서가 강렬하다 하여 항상 참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기쁨의 경우 크게 기뻐해야 하고(마 5:12, 벧전 1:8, 빌 4:4, 시 71:23), 사랑의 경우 힘써 사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정서는 성격상 강렬하다. 그러나 강렬한 정서도 신령하지 않거나 구원의 은혜와 무관할 수 있다. 예컨대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을 위해 눈이라도 빼 줄 것처럼 사랑이 강렬한 듯했고(갈 4:15), 하나님의 이적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으나 곧 시들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했다(시 106:9-14).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를 위해 호산나 찬송하던 사람들이 며칠 안 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크게 소리질렀다(마 21:9-10, 27:22-23).
2. 강렬한 신체적 반응 강렬한 신체적 반응들은 종교적 정서와 관련되기도 하지만, 세속적인 일이나 마귀의 역사에 의해 신체적 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육체적으로 크게 떨거나(합 3:16, 시 119:120) 힘이 갑자기 빠지거나(단 10:8) 죽은 자처럼 되며(계 1:17) 소리를 크게 지르는 일이 있을 수 있다(시 84:2)(주의 : 성령으로 말미암으나 아직 도덕적 삶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악귀의 역사로 말미암아 몸이 상할 수도 있고(행 19:16), 경련을 일으키기도 한다(막 1:26, 5:6, 9:26). 어떤 사람들은 충격적인 교통사고를 보고서도 기절하며 최면술에 걸려 쉽게 넘어지기도 한다.
3. 열정적 열변과 뜨거운 감정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신앙을 열변하다 하여 항상 신앙적으로 참된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마 23:2-3), 개종하기 전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대표적인 경우였다(행 22:3).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반드시 참된 종교적 정서는 아니다. 성령의 감동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갖게 할 수 있다(엡 1:17-20). 이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몸소 경험할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무도 자랑할 수 없게 한다(고전 1:27-29).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경험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 일이 있다(히 6:4, 5, 9).
4. 성경에 대한 감정적 반응 성경에 대한 감정적 반응들이 은혜로운 정서의 증거가 아닐 수 있다. 성경을 통해서 두려움, 소망, 기쁨, 슬픔 등을 체험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고 마귀의 속임수일 수 있다. 마귀도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속일 수 있다(벧후 3:16).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 같은 마음도 처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으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므로 그 기쁨은 참된 것이 아니다(마 13:20, 21).
5. 멋진 사랑 사랑을 베푼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참된 종교적 정서의 증거는 결코 아니다. 마귀는 가장 좋은 성령의 은사를 위조한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랑을 베푸는 것은 종교적 정서들이 성령의 거룩케 하며 구원하는 은혜의 역사임을 나타내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여긴다. 이것은 사탄이 결코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 본성이 원수 맺는 것과 사악 등으로 되어 있는 사탄의 경우, 사랑은 전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랑은 참으로 기독교적임에 틀림없다고 속단한다. 물론 사랑은 성령의 은혜들 가운데 으뜸이요, 모든 참된 종교의 생명이자 본질이며 총합이다. 그러나 사탄은 사랑을 위조한다. 성령의 은혜들 가운데서 사랑과 겸손만큼 가짜가 많은 것은 없다. 종말에는 사랑이 식는다. 사랑하되 오래 지속적으로 하지 못한다. 사랑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마 24:12, 13).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 바울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 같으나(갈 4:15), 그들을 위한 바울의 수고가 헛될 뻔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갈 4:10), 그리스도인의 사랑에도 가짜가 있을 수 있다. 가짜 사랑이 더 아름답고 멋지게 보일 수 있다.
6. 회심 체험 영적 각성과 양심의 뉘우침에 이어서, 마음에 위로와 기쁨을 누린다고 해서 다 성령으로부터 온 종교적 정서는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하며 기쁨을 주시기 전에 광야의 고통을 당하게도 하시고(출 14:10-13, 신 8:2), 사망선고를 받은 것처럼 절망적이 되게 하기도 하신다(고후 1:8, 9). 아브라함의 경우, 큰 어두움으로 두려움에 떨게한 다음 달콤한 약속을 주셨다(창 15:12, 13). 그러나 양심의 가책과 공포심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양심이 뉘우침을 갖게 될 때 지옥의 공포감을 갖기보다는 마음이 해방감을 맛보게 되는 수가 있다(요 4:16-19, 28-29).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기질상 두려움과 공포감을 갖기도 한다. 또한 사탄도 하나님의 성령의 모든 구원활동과 은혜들을 위조할 수가 있다(예 : 사울왕의 경우, 삼상 24:16-17, 26:21). 회심 체험들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려면 시간이 경과되면서 좀더 지켜보아야 한다.
7. 헌신적 노력 참된 종교적 정서들은 그것을 위해 사용된 시간이나 노력에 반드시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성경 읽기, 기도, 찬송, 설교듣기 등에 시간을 많이 사용할수록 종교적 정서가 활발해진다. 예로 안나 여선지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겼다(눅 2:37).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그렇게 했다(행 2:46, 47). 다윗도 아침, 낮, 저녁으로 힘써 기도했다(시 55:1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심있는 제물이 하나님께 가증되기도 했다(사 1:12-15). 바리새인들은 길게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으며(눅 18:12), 거짓된 종교는 종교적 의무와 규례를 지키는데 열심을 내게 하기도 한다(사 58:2, 갤 33:31, 32).
8. 외형적 증거 외형적 증거들은 참된 종교적 정서들을 입증하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사람의 눈에 보이는 대로, 또는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해서도 안된다(사 11:3). 누가 정말로 경건한 성도인지를 확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실루아노가 그리스도의 빼어난 종이었을 것이지만 ‘신실한 형제로 생각되는(supposed)\'(벧전 5:12) 사람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참된 정서와 거짓된 정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양과 염소, 즉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를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C. 거룩한 정서들의 두드러진 표증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pp. 162-548.
1. 정서의 원천 (성령) ‘영성’이란 용어는 육체 또는 물질적 요소와 구별되는 사람의 영이나 혼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들 안에 성령이 내주하여 거룩하게 영향을 행사하여 감동 감화 인도 주장하시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들로 불리운다. 그리고 신령한 것으로 불리우는 일들은 성령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고전 2:13, 14, 롬 8:6, 9). 그리고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란 성령의 통상적인 감화를 가끔 경험하는 자들이 아니고, 성령을 좇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체질화된 사람 곧 성령으로 그 생각과 삶이 항상 인도되고 주장되는 경건한 사람을 가리킨다(갈 5:16, 25).
2. 정서의 표증 (성령의 내주와 거룩한 삶) 거룩한 정서의 첫 번째 표증은 하나님의 성령의 내주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참 성도에게 임하여 자기의 영구적인 거처로 삼아 그 안에 거하신다. 성령은 활동적이시어 성도들을 감동하시며 또한 그들을 성전 곧 거처로 삼아 그들 안에 내주하신다(고전 3:16, 고후 6:16, 요 14:17). 그러므로 성도들이란 그들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이다(갈 2:20). 그리스도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 계실 뿐 아니라 사시는 것이다. 즉, 연합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의 성령이 그들 안에서 생수의 강이 되어 넘쳐흘러 영생을 누리게 한다(요 4:14, 7:38-39). 그리고 그들 안에 생명의 원리 곧 생수의 원천으로 내주하시는 성령은 그 자신의 본성을 따라 거룩을 열매 맺는다. 즉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케 한다(히 12:10, 요일 1:3). 그러기에 성도는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고후 5:15-17, 빌 3:3, 벧후 1:4).
3. 정서의 목적 (하나님께 영광) 은혜의 정서의 기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령의 거룩하고 참된 은혜의 정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으뜸되는 목적으로 하며, 인간의 자아 중심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그것을 행복으로 삼아 기쁨을 누린다.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성도는 우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좋아한다(요일 4:19-21). 그리고 범사에 하나님을 높이며 감사한다(살전 5:18, 참조 ; 롬 1:21-23).
4. 정서의 기초 (하나님을 즐거워함) 거룩한 정서의 기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즐거워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진실하심과 선하심은 한마디로 그의 거룩하심으로 표현될 수 있고, 그의 권능과 지식과 지혜는 그의 위대하심으로 표현될 수 있는바, 그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즐거워하는데 거룩한 정서가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사 6:3, 요 12:41, 계 4:8, 15:4). 세상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좋아한다(요 12:43).
5. 정서의 형성 (성경 말씀을 깨달음으로) 거룩한 종교적 정서는 마음이 성령으로 깨달음을 얻어 생겨난다. 거룩한 정서는 빛이 없는 열과 같은 것이 아니다. 즉 실제적인 지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영적 교훈에 정서가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의 정서를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전에 이해하고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에 계시되어 있는 영광스런 진리에 대해서 알게 되는 까닭이다. 더 확실하고 깊은 지식을 얻게 될 때 종교적 정서가 뜨거워진다. 신령한 지식은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열어주고, 정서를 뜨겁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이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알며(요일 4:7), 지식과 총명이 있는 곳에 사랑이 더 풍성해진다(빌 1:9). 지식이 없는 열심은 헛된 것이다(롬 10:2).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이하여 줄 때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듯이(눅 24:32), 거룩한 정서는 성령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을 비추어 줄 때 뜨거워지는 것이다. 이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2:14, 마 11:27). 그런데 신령한 지식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데 있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지 못한다(벧전 1:15-16, 살전 4:3, 7-8). 한편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신비한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할 줄 알면서도 구원의 은혜를 전혀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전 13:2). 성경을 바르게 그리고 신령하게 이해하려면 성경의 내용을 이해할 뿐 아니라 성경의 깊은 의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참되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성령으로 마음 깊숙히 터득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롬 10:10). 그러기에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 및 신령한 것들에 대하여 얻는 지식은 성령의 비추임을 통하여 마음을 감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칼빈이 말한 대로, 우리의 신앙은 지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이다(「기독교강요」Ⅲ.ⅱ.8).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첫째로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그 다음에는 그 의무를 충실히 실천하도록 강력하게 이끄신다.
6. 정서의 확실성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함으로) 종교의 정서는 역사적 증거와 참된 확신에 있다. 참으로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와 능력을 확실하고도 충분하게 확신하는 자들이다(요 6:68-69).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는데서 종교적 정서가 있다. 기독교의 교리들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참되고 신령한 믿음에서 난 정서를 가져야한다. 그리고 그 신령한 믿음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임재를 체험한다(요 16:27, 요일 4:15).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방도와,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가 예비해 놓으신 영광의 세계에 대한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는데에서 오는 정서가 아니면 그것은 환각이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다. 거룩한 정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서 온다(고후 3:18, 4:3-6).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하는 신적 영광을 보고 즐거워함으로써 우리의 정서가 뜨거워진다(요 1:14). 그러나 종교를 이해관계 때문에 믿는 자들은 아무리 뜨겁게 경험하고, 복음의 진리를 확실하게 찬동하는 것 같을지라도 마침내는 불신앙과 무신론으로 빠지게 되기 때문에 참된 정서가 아니다.
7. 정서의 겸비성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됨을 보고서) 종교적 정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데 있다. 종교적 정서는 복음적인 겸손을 수반한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가치함을 느낄 뿐 아니라, 자신의 궁핍을 인하여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까이하며 의지하는 겸손이 은혜로운 정서이다. 복음적 겸손은 외식적인 것과는 달리, 성령의 특별한 감화로부터 오는데,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원리들을 심어주고 단련시킴으로써 온다. 외식적인 겸손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고 율법의 엄격성 앞에서 압도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적 겸손은 거룩한 하나님을 높이고 추악한 자신을 철저하게 낮춘다. 겸손은 자기를 부인하고(눅 18:9-14) 대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빌 2:3).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자기 자신이 더욱 작게 보이고 하나님은 크게 보인다. 자신의 겸손을 큰 소리로 자랑하지 않는다(참조, 슥 13:4, 사 58:5, 마 6:16).
8. 거룩한 정서의 특이점 : 성품의 변화 (그리스도를 닮음) 거룩한 정서는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거룩한 종교적 정서는 우리의 성품의 변화를 수반한다.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한다(고후 3:18). 성령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성품이 변화되는 회심을 경험한다(롬 12:1-2, 엡 4:22-24). 특별히, 예수님의 온유함을 본받아 양이나 비둘기처럼, 사랑과 온유와 고요함과 용서와 긍휼을 함양해야 한다(골 3:12-13, 갈 5:22-23, 마 11:28-29). 또한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견고하며 흔들림이 없이 인내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안다(딤후 2:3-4).
9. 균형있는 성장 (거룩한 불꽃처럼) 은혜로운 정서는 균형 감각을 갖되 활발하게 성장한다. 그리스도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것처럼(요 1:14-16),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은 뒤집지 않은 호떡(빈대떡, 전병)과 같지 않다(호 7:8). 성도들에게는 거룩한 소망과 거룩한 두려움이 함께 있으며(시 33:18, 147:11), 무서움과 기쁨이 함께 있으며(마 28:8), 성도들은 종교적인 교제와 담소를 즐거워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떠나서 홀로 하나님과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한다(창 24:63, 요 6:15).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슬퍼할 줄 알 뿐 아니라 기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거짓된 사람들은 편애하며(마 5:46), 다른 사람의 약점에 대해 비판적이고,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실망하거나 포기한다(유 12, 13). 종교적 정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경건과 의 등 신령한 것들을 더욱더 사모하며 즐거워한다(사 33:6, 딤전 6:6).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이 너무 좋아서 다른 것들로는 삶이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다(벧전 2:2-3). 이는 마치 타오르는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탈수록 더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것과 같다. 종교적 정서는 거룩한 불꽃처럼 한번 타오르면 더욱 강렬하게 타오른다.
10. 실천적 생활 영성 (거룩한 삶과 열심) 종교적 정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실천적이게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행실이 기독교적 원리들에 전적으로 일치한다. 둘째 거룩한 삶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셋째 죽을 때까지 꾸준하게 일관성 있게 거룩한 삶을 지속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정결케 하며 죄를 범하지 않고 의를 행한다(요일 3:3-8, 5:18).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헌신하여 선한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열심을 내야 한다(단 2:14, 빌 3:13, 히 6:11-12). 종교적 정서는 실제적 삶에서 열매를 맺는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살아 계시고 성령이 내주하여 영혼의 기능들과 연합하여 하나님 자신의 본성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은혜는 삶을 힘있게 하고 거룩한 열매를 맺는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는 죽지 않고 살아계시며,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역사하며(고전 2:4) 그러기에 우리의 복음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으로 된다(살전 1:5). 우선 종교적 정서는 경건의 능력으로 나타난다(딤후 3:5). 즉 세상을 이기며 사람의 정욕과 부패한 마음을 억제하고 많은 유혹과 난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길로 정진한다. 따라서 모든 거룩한 정서의 초석은 도덕적으로 탁월하고 아름다운 거룩성이다.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종교적 정서가 거룩성을 지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한 종교적 정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복음의 진리가 확실함을 확신하기 때문에 역경 중에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인내하며 경건하게 살기를 힘쓴다. 그리고 종교적 정서로 말미암아 심령이 변화된 까닭에 실제적인 삶에서도 철저한 변화가 따른다. 그래서 겸비하여진다. 그리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린다(살전 5:22). 종교적 정서는 그 자체가 열성과 활동성과 지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체험하면 거룩한 삶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 실천이 은혜의 진실성을 증거하는 것이요 참된 고백이 거룩한 삶으로 나타난다(마 7:16-20).
11. 구원의 진실성을 위한 증거 : 실천 종교적 정서에서 나온 실천은 참된 종교에 있어서 구원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증거이다. 실천은 갑작스런 회심이나 신비한 경험, 감정적 위로보다 더 나은 구원의 증거이다. 첫째 참된 종교는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최우선 순위를 둔다. 즉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요 하나님 제일주의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하나님이 좋아서 세상의 쾌락이나 재물을 기꺼이 버리는 것이다. 이같은 행동은 마음의 정서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악한 삶을 살면서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갈 6:7, 욥 34:22). 둘째 참된 신앙의 진실성은 시련을 통해서 검증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훈련을 통해서 그들을 낮추시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셨다(신 8:2).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인내케하고, 그 믿음이 정금처럼 단련되게 하신다(약 1:2-3, 벧전 1:6-7).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에 순종함으로 그의 참된 신앙을 입증하였다(창 22:12). 셋째 참된 종교는 실천을 통해 성숙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최상의 증거는 거룩한 실천이다. 신앙은 그 실천과 더불어 나타나고 실천을 통해서 믿음이 온전케 된다(약 2:22). 하나님을 알며 사랑하면서도 그의 계명을 실천하여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요일 2:4-5). 넷째 참된 종교의 최상의 시금석은 실천이다. 거룩한 실천이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진실성을 가늠하는데 제일의 증거가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게 되고(요일 3:14) 이로써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확증되고 우리 마음이 주님 앞에서 굳게 서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은혜는 실천에서 증거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이다(요 14:15, 23, 요일 2:3-5, 3:24, 4:8, 12-13, 5:3). 여섯째 심판 날에 실천이 증거가 된다. 거룩한 실천의 증거가 심판날에 상급의 기준이 된다(롬 2:5). 실천은 회개의 증거요(마 3:8) 구원 얻는 믿음의 증거이며(약 2:21-24, 요삼 3) 그리스도의 임재의 증거이고(딤후 1:11)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며(시 116:12, 50:23)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purpose)이다(행 20:35, 고전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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